English Text here
First published in "Wingspan" September 1990. PDF version, with illustrations and photos available here
김포공항에서 서울로 가는 길은 현대를 통하여 훌쩍 역사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이라 할 수 있다. 현대적인 고층 아파트가 빼곡히 열을 지어 서있는 단지를 지나서 올림픽 대로를 벗어나면 서울의 북쪽 끝에 있는 산이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길이 좁아지고 화강암 석재와 철재, 유리 건축재로 만든 사무실과 호텔, 가게들이 서서히 나타날 것이다. 일단 숨을 쉬고 분주한 현대인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들어보자. 도시의 소음에 둘러 쌓여 보라. 그런 다음, 바위가 많은 산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보자. 바로 이곳이 조선의 왕들이 태어난 서울이다.
롯데호텔에서 15분쯤 걸어가면 북악산 기슭에 서있는 경복궁을 볼 수 있다. 경복궁은 1394년에 지어진 것으로 북악산의 완만한 골짜기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우주의 힘과 땅의 기운이 인간과 조화를 이루는 곳이기 때문에 궁궐터로 정해졌다고 한다. 산의 경관이 인상적이며 지형이 방어를 하는데 도움이 된다.
경복궁 옆 작은 언덕에는 두꺼운 기와를 얹은 1층집들이 모여있다. 바로 이곳이 가회동이다. 가회동은 “아름다움이 모이는 지역”이라는 뜻이다. 말 그대로이다. 언덕과 산마루를 타고 좁은 길과 계단, 골목이 사방으로 퍼져, 옹기종기 모여 있는 작고 큰집들로 이어져 있다. 이 집들이 한옥, 즉 전통 한국 가옥이다. 이곳 가회동에는 약 200채 정도의 한옥이 남아 있으며 가회동은 이제 보전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1987년 아내와 나는 이 곳에한옥을 갖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 때부터 한국 건축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서울에 오래 살았던 사람들조차도 가회동을 보면 놀라요. 전통 한국 가옥은 그 선이 매우 아름답죠. 완전한 직선이나 사각형, 평면은 없어요. 모든 부분이 특유의 질감을 가지고 있고 또 약간씩 다르죠. 한옥에 있는 것만으로도 휴식이 된답니다.” 아내가 한 말이다. 전적으로 동감한다.
Bamboo Pins and a Sense of Balance
전통적인 겉모습과는 달리, 가회동에 있는 집은 일부 더 오래된 집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 1930년대에 지어졌다. 가회동 한옥 스타일은 1897년까지 조선왕조 500년에 걸쳐 완성된 것으로 전기와 같은 현대적 편의 시설도 약간 갖추고 있다. 당시 한옥을 지을 때 사용한 기술도 전통적인 것이었다. 1930년대만 해도 콘크리트나 철근, 알루미늄, 못, 나사 등이 집을 짓는데 많이 사용되지 않았다. 대신 사람들은 장부이음과 나무나 대나무로 만든 못 그리고 균형감을 이용하여 튼튼하고 견실한 훌륭한 한옥을 만들었다.
조선의 유교 선비-귀족층이라 할 수 있는 양반들이 한옥에 거주했으며 이 양반들은 가회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장식 스타일, 들보의 크기, 지붕의 경사도, 방의 개수는 사회적 신분에 따라 결정되었다. 1930년대에는 양반제가 사라졌지만 옛날 신분제의 상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바람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거리에서 보면 한옥들은 사람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며 신비해 보이기까지 한다. 대부분의 한옥은 1층집으로 높은 벽으로 감춰져 있다. 집의 처마와 벽만 보인다. 장미와 담쟁이덩굴이 벽에 걸쳐져 있다. 웃음소리와 음악이 처마와 벽을 타고 흘러나온다. 아이들은 큰 대문 앞에서 나와 논다. 하지만 겉에서 보기엔 사람들의 삶은 모두 그 안에 숨어있다.
영국인의 집을 성이라고 비유한다면 한국인의 한옥은 요새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한국이 많은 전쟁과 외세의 침략을 겪었다는 점을 감안해 볼 때 한국인의 보호적 성향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분명히 모든 집이 장기간의 포위에 견딜 수 있도록 되어야 할 필요는 없다. 한국인에게 있어 진정한 적은 좀더 근본적인 것으로 이 적은 인간보다 훨씬 모질다. 바로 겨울이 한국인의 적이었다.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이 겨울이라는 적은 늘 찾아왔었고 여름에만 잠시 휴전을 선언했을 뿐이었다.
Beware of the Hot Spots
긴 겨울에, 차갑고 건조한 바람이 시베리아에서 한국으로 몰려온다. 온도는 영하 10도나 영하 20도, 심지어는 영하 30도 이하로도 떨어진다. 여름에 태평양에서 올라오는 장마 전선은 한국에 비를 몰고 오며 온도를 30도 이상으로 끌어올린다. 하지만 매섭게 추운 겨울이 더 문제였다. 그 결과 한국의 가옥들은 한국 특유의 난방장치를 진화시켰다.
겨울이라는 불청객은 집으로 와서 무릎을 꿇고 손을 방바닥에 얹어 놓는다. 기도를 하는 것도 아니고 집주인에게 예를 취하기 위함도 아니다. 한옥에서는 벽난로가 아닌 방바닥이 온기를 유지하는 생명의 근원이다. 바로 이것이 한국 가옥의 중심을 이루는 (“따뜻한 돌”을 의미하는) 온돌이다. 온돌의 기원은 분명치 않지만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는 온돌이 5세기부터 계속 사용되었다.
크게 눈에 띄는 것은 없다. 온돌바닥에는 방석과 간단한 가구를 제외하면 다른 장치는 없다. 처음 보면 오래된 노란색 리놀륨을 벽면 모서리에 맞춰 방바닥에 얹어 놓은 것 같다.
오래된 집의 경우 방바닥은 아궁이 위에 돌을 놓아 만들었다. 부엌의 불 또는 외부 화로의 열이 송기관을 통하여 전달되어 돌과 방을 데웠다.
현대 가옥에서는 돌 대신 콘크리트가 쓰인다. 오늘날의 온돌은 가스나 전기, 온수 파이프, 혹은 냄새가 고약한 연탄을 사용하여 데운다. 그래도 온돌 색깔은 항상 노란색이다.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방안에서 제일 따뜻한 곳은 물론, 온돌이 얼마나 됐는지, 불을 떼는 곳이 어디인지를 곧장 찾아낼 수 있다. 전통적으로 돌로 만든 방바닥은 고운 황토를 얇게 발라 덮었다. 그리고는 얇은 종이를 붙인 후 좀더 두꺼운 재질의 수제 한지를 여러 번 덧대어 붙였다. 그리고는 콩과 야생 참깨를 헝겊에 넣어 갈아서 얻은 식물성 기름을 종이 위에 다시 발랐다. 기름이 스며들면서 방바닥 색도 천천히 변한다. 기름이 완전히 마르면 옅은 노란색이 된다. 그리고 온돌이 데워지면 색깔은 더 진해진다. 온도가 더 높아 질수록 종이의 색깔도 더 진해진다. 불을 사용할 경우 불에서 멀어질수록 바닥의 색깔은 옅어진다. 방바닥 밑 송기관이 지나가는 길도 이 색깔은 통해 알 수 있다. 세월이 지나면 노란색은 진한 밤색으로 변한다.
제일 따뜻한 곳은 주로 손님을 위한 곳이다. 잔학한 시대에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나 죄수들을 뜨겁게 달군 온돌방에서 산채로 굽기도 했다. 구웠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고대 두루마리 문서를 보면 온돌은 나무화덕 위에 올려놓은 돌로 만든 큰 접시처럼 그려져 있다. 돌은 열기를 오래 간직하기 때문에 불이 너무 뜨겁지만 않으면 아주 안락한 장소였다. 따라서 난방을 위해 이 온돌 접시를 크게 만든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아직도 한국에는 부엌에서 사용하는 열기로 온돌을 데워서 사용하는 오래된 집이 많다.
전통 온돌은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송기관을 통해 공기가 흐르기 때문에 시원하다
The Richer the House, the Bigger the Wood
벽과 지붕 역시 열기를 보전하기 위한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 한옥의 골격은 무거운 나무로 만든 사각 기둥을 섬세하게 연결한 것으로 각 모퉁이의 주춧돌 위에 놓여진다. 나무로 만든 사각 기동은 천장을 이루는 나무 석가래 층을 받쳐준다. 석가래 층이 많을수록 지붕의 경사가 커지면서 집 높이도 높아진다. 석가래는 옥수수대와 짚단, 진흙, 그리고 모래로 이루어진 층을 지지한다. 맨 위에 진한 회색의 기와를 얹으면 집이 완성된다. 이렇게 완성된 집은 어떤 날씨에도 견딜 수 있다. 겨울에는 열기가 집안에 머무르고 여름에는 열기가 밖으로 빠져나간다. 벽면도 진흙과 옥수수대로 만들어서 진흙을 다시 얇게 발라 마무리한다. 창문 격자와 방문에도 수제 한지를 여러 번 덧대어 발라 훌륭한 인테리어를 완성한다.
집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하여, 아주 큰 소나무 기둥을 사용한다. 집 가운데로 “대들보” 즉 “큰 나무 기둥”이 지나가는데 이는 지붕을 떠받치는 역할을 한다. 주인이 부자일수록 대들보가 더 크다.
온돌방에는 단열효과를 높이기 위해 붙임 천장이 설치된다. 하지만 복도나 손님을 맞는 곳으로 쓰이는 마루에서는 석가래와 나무 기둥의 웅대함을 볼 수 있다.
내부에 아름다움을 더하는 나무 기둥은 외부에서는 좋은 난방재 역할을 한다. 벽에서 나온 석가래는 툇마루 위에 있는 처마가 된다. 나무의 풍부한 색깔은 흰색의 벽과 대조를 이룬다. 페인트가 나오기 전 한국인 기술자들은 옥수수대와 미역을 끓여 여과지에 거른 후 석회에 섞어 현대 페인트가 표현할 수 없는 밝고 따뜻한 색을 표현했다.
The Missing Garden
날씨 다음에, 한국의 사회적 삶과 가옥 설계에 가장 오랫동안 영향을 준 분이 유교의 공자다. 그는 7세가 지난 남녀는 한자리에 앉는 것을 금하는 윤리 규범을 제정했다. 전통적으로 한국 가옥은 남자를 위한 사랑채와 여자를 위한 안채 두 부분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집이 크면 사랑채와 안채는 다른 건물에 있으며 벽이나 대문으로 나눠져 있다.
안채는 부인과 큰 딸들이 지내는 곳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바느질을 하고, 음식을 준비하던 곳이다. 부엌과 고방, 집주인의 침실이 달린 안방이 모두 안채에 있었다.
사랑채는 집주인의 사실이나 서재, 조상을 모시는 사당, 그리고 여분의 침실이 있던 곳이다. 손님들은 사랑채에 묵었다. 여가 놀이를 위해 바둑이나 가야금을 사랑채에 두기도 했다. 손님 접대를 위해 차 그릇세트도 있었다. 선비들을 위해서 책, 문서, 붓도 있었다. 얇은 방석과 깔개를 두어 바닥에 편안하게 앉고 누울 수 있도록 했었다.
내가 살고 있는 한옥은 두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아내와 나는 안채에 살고 장모님은 사랑채에 머무른다. 안마당에 방이 따로 하나 더 있다. 장모님은 이곳에서 야채와 빨래를 씻는다. 바로 이곳이 김치와 된장, 간장을 만드는 곳이다. 안마당은 바베큐 파티나 대화를 하기에 좋고 잉어를 관찰하거나 연꽃이 있는 연못을 볼 수 있다.
한옥은 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서양인에게는 뭔가 빠진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바로 정원이 없는 것이다. 공간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큰 사찰이나 왕들이 사는 궁궐에도 큰 안마당만 있을 뿐이다. 나무나 관목이 있을지는 몰라도 집을 완성하거나 자연경관을 집으로 들여오기 위해 자연을 조작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일본의 정교하게 다듬은 정원에 대응하는 것이 한국에는 없다.
“일본사람들은 산이나 호수를 좋아해서 이 풍광을 자신들의 정원 속에서 다시 재현하고 싶어 하지요. 하지만 한국사람들은 자연 속에서 자연을 즐기고 싶어합니다” 명지대 한국건축문화연구소의 오방일 연구원의 말이다.
한국에서 교외에 가보면 정자를 여러 개 볼 수 있다. 이 정자는 사람들이 쉬어가거나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 서울의 자랑거리인 “비원”(창경궁)도 사실은 왕족이 쉬고 여가를 즐기던 곳으로 원래는 자연을 그대로 보존한 78에이커의 땅이었다.
안마당에 있는 나무는 우연처럼 보이겠지만, 모두 이유가 있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것이다. 나의 장모님인 오시순 여사는 이 분야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
“집 근처에 복숭아 나무를 심지 마라. 유령과 붉은 혼들이 찾아오는 길을 마련해준다. 조상들이 후손을 축복하기 위해 오는 길을 막을 수도 있다.”
"백단 나무는 우물 근처에 심으면 좋다. 잎이 떨어지지 않고 해충을 막아주고 백단 나무 뿌리는 땅을 정화해준다.”
“안마당에큰나무를심지마라. 생명에필요한태양의빛과온기를가린다. 또한나무뿌리는건물의기반을약화시킬수있고집안에근심거리만가져온다.”
많은 가회동 주민들이 현대적인 아파트촌에 살고 싶어하지만 우리 이웃집에 사는 정석만씨는 한옥만을 고집한다. 정석만씨와 그녀의 가족은 아이들 학교를 위해 20년 전에 교외에서 가회동으로 이사 왔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집이 주는 느낌이 좋습니다. 아들은 현대적인 아파트에 삽니다. 아들 가족을 방문할 때면 콘크리트 건물이 저를 짓누르는 것 같습니다. 요새 건물은 오래된 건물과는 달리 특징도 없고 독창성도 없어요. 가회동에서는 집 하나하나가 특색이 있습니다. 모두 장인들이 나무와 돌, 종이, 흙, 볏짚을 이용해서 만든 집들입니다. 집들이 살아있고 온기가 느껴질뿐더러 아주 편하게 느껴집니다.”
한국에는 오래된 전통이 현대문명과 잘 공존하고 있다. 한방과 현대의술 모두 시행되고 있으며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다. 무속인들은 자신들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정기를 불러내 악을 막고 이들을 축복해준다. 한국의 민속예술과 수공예는 현대인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인간이 산과 숲과 함께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는 청룡백호 지형으로 둘러싸여 있다. 나무와 흙, 종이, 그리고 돌로 만든 집에 살게 되면 자연과의 교감이 쉬워진다. 그렇다고 해서 흙점이나 정령신앙을 믿을 필요는 없다. 오세순 여사의 말을 들어보자.
“난 처음 한옥에서 자라다 이후에는 아파트로 이사를 했지. 다시 한옥으로 돌아와서 화분에 물어주고 물고기 밥을 주고 새소리를 다시 듣게 되어 매우 기쁘다네.”
저자 데이비드 킬번씨와 그의 부인 최금옥씨가 여러분의 발걸음을 현대생활에 맞게 그리고 전통을 존중하며 행복하게 블랜딩된 ‘The House of Choi’ 가회동 한옥으로 초대합니다. 한옥은 선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직선이나 직각이나 평면보다는 둥그럽고 자연스러우면서 보통 생각한 것 이상으로 건축법이 지혜로우면서 모두 친환경 재료를 사용했습니다.
David Kilburn, June 2005
[ Original article first published in All Nippon Airways' Wingspan in-flight magazine, September 1990 ]
1988년부터 한옥에서 살아온 나의 한옥 사랑이 이웹싸이트의 계기가 되었다. 현재는 공익을 도모하기 위해 발전해 나가고 있다. 공익을 위하여, 우리는 서울시에 남아있는 전통 가옥인 한옥을 보호하는 데에 생겨나는 문제점들에 대한 문서, 수필, 의견 또 사진들을 발표하고 있다. 현재 한국의 하회마을과 양동, 이 두 한옥 마을이 유네스코로부터 세계문화유산 지정지로 인정을 받으면서, 전통한옥은 전 세계의 관심사가 되고있다. 우리는 이 웹사이트를 통해 독자들에게 한옥이 어떻게, 왜? 계속 파괴되어지는지, 누가 그 책임을 지고 있는지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하며 또한 어떠한 조취가 취해져야 하는지에 대한 의견을 조성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아울러 이 웹사이트가 사라지는 서울의 한옥 문화유산의 보호를 돕기 위해 우리 개개인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이다. David Kilburn